국악현악기제조원

아쟁, 가야금, 거문고 같은 국악 현악기를 제작하는 직업이다.

국악현악기제조원 직업 종사자가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
국악현악기제조원 직업 종사자가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
가야금제조원거문고제조원아쟁제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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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업무

수행 직무

  • ▶ 작업대에 놓을 오동나무 또는 밤나무를 작업지시서에 맞춰 마련한다.
  • ▶ 준비해 둔 재료를 절단톱 등으로 규격에 맞게 잘라 낸다.
  • ▶ 절단한 재료를 자연 건조한다.
  • ▶ 자른 나무는 대패·끌 등으로 깎아서 두께와 폭을 일정하게 맞춘다.
  • ▶ 접착제를 써서 오동나무 위판과 밤나무 뒤판을 서로 붙인다.
  • ▶ 오동나무판은 나무못 또는 접착제를 이용해 공명통의 위쪽과 아래쪽에 붙인다.
  • ▶ 봉미(줄 매는 부분)는 공명통 밑부분에, 학·달·해 등의 무늬는 접착제로 공명통 윗부분에 붙인다.
  • ▶ 악기 변형을 막기 위한 작업으로, 인두를 이용해 오동나무 위판 자체를 무늬가 드러날 정도까지 긁어낸다.
  • ▶ 모양을 내기 위해 대패·끌 등으로 다듬질한다.
  • ▶ 손으로 명주실을 꼬되, 횟수는 악기 크기에 따라 일정하게 정해 현을 제조한다.
  • ▶ 증기와 열을 가하는 방법으로 꼬아진 명주실을 고정해, 실이 풀리지 않게 한다.
  • ▶ 제조된 공명통에 현을 걸어준다.
  • ▶ 안족은 기러기 발모양 버팀목으로, 현과 공명통 사이에 끼워 넣는다.
  • ▶ 제품 검사는 완성된 제품을 눈으로 확인하는 방식이고, 음정 검사는 악기를 직접 연주해 본다.
  • ▶ 정간(음 높낮이 조절 칸)은 음정 간격에 따라 접착제로 붙이기도 하며, 제품 도장은 필요에 따라 붓 또는 스프레이로 하기도 한다.

작업강도

보통 작업

작업장소

실내

육체활동

청각, 손사용, 시각

커리어 전망

K-팝과 퓨전 국악 열풍으로 전통 현악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나, 전문 제조원 수요는 전국에 수십 명 수준으로 극히 제한적이다 .[1] 국공립 국악단체의 고품질 연주 악기 수요와 음악 교육용 보급형 악기 시장이 꾸준히 유지되어 안정적 기반 역할을 한다 .[2] 기계 대체가 어려운 정밀 수공예 특성상 소수 전문 장인 중심 구조가 유지될 전망이며, 국가무형유산 전승 제도를 통해 기술 후계자가 지속 양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3]

워라밸 & 사회적 평가

워라밸

국악현악기제조원은 소규모 공방이나 단독 작업실에서 혼자 또는 소수 인원과 함께 일하며, 주문 수량에 따라 작업 일정이 결정된다 .[4] 오동나무 울림통을 건조·가공하고 대패질로 두께를 조절하는 목공 작업과 명주실로 줄을 꼬는 섬세한 수공예가 주요 업무다 .[5] 악기 완성까지 수주에서 수개월이 소요되며, 완성 악기를 직접 연주하여 음향 품질을 점검하는 능력도 요구된다 .[6]

사회적 기여

국악현악기제조원은 수천 년 역사의 한국 전통 현악기 문화를 물질적으로 지탱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7] 이들이 제작한 가야금·거문고·아쟁은 국공립 국악단체의 공연과 음악 교육 현장에서 사용되어 전통예술의 전승과 보급을 실질적으로 지원한다 .[8] 국가무형유산 악기장 제도를 통해 제조 기술이 후대로 이어지고, 한류 확산과 함께 해외 공연·문화 수출을 통해 한국 전통 악기 문화를 국제 무대에 알리는 공공재 역할도 수행한다 .[9]

여담

  • •

    가야금은 풍류가야금과 산조가야금 두 종류로 구분되며, 풍류가야금은 오동나무 통나무를 통째로 깎아 공명통을 만드는 반면 산조가야금은 윗판과 밑판을 따로 만들어 붙이는 조립 방식으로 제작된다 .[10] 거문고 몸통은 앞면을 오동나무로, 뒷면을 밤나무로 제작하며, 명주실 6줄을 술대(해죽)로 치고 뜯는 악기로 소리가 낮고 중후하다 .[11] 아쟁은 오동나무 공명통에 명주실 7~10줄을 얹어 개나리나무 활대로 연주하는 찰현악기로, 정악 아쟁과 산조 아쟁으로 구분된다 .[12] 국악현악기 제조 장인 최태순(경기도무형문화재 제30호)은 15세에 기술을 익히기 시작해 65년 이상 가야금·거문고·아쟁을 제작해 온 사례로, 1961년 국립국악원에서 전국 최고 악기장 3인 중 한 명으로 선발된 바 있다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