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발원사가공처리원

가발원사가공처리원은 배합과 정리, 재단, 염색, 표백 등의 작업으로 원사를 가공 처리해 가발 제조에 사용되도록 한다.

가발원사가공처리원 직업 종사자가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
가발원사가공처리원 직업 종사자가 업무를 수행하는 모습
가발 원사 가공표백·염색정모·정리가발 산업

직업 상세 정보 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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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업무

수행 직무

  • ▶ 비눗물에 입고된 머리카락을 담그고 이물질을 제거한 다음, 정모용 원사로 분리한다.
  • ▶ 원하는 색상에 맞춰 원사를 일정 시간 표백 공정에서 처리하거나, 염색통에 넣어 염색한다.
  • ▶ 통에서 꺼낸 원사는 줄에 걸어 자연 건조한다.
  • ▶ 건조한 원사를 작업대에 놓는다.
  • ▶ 간헐적으로 가발원사에 약품처리와 열처리를 한다.
  • ▶ 원사를 고정된 빗니 사이로 통과시킨 채 당겨 엉킨 부분을 제거한다.
  • ▶ 길이에 따라 원사를 구분한 후 칼을 사용해 재단한다.
  • ▶ 재단된 원사의 중량은 재단 완료 후 저울로 측정해 기록한다.
  • ▶ 모발을 산·소다액으로 세척하거나 그 액에 담가 간헐적으로 색을 엷게 하거나 그을린다.

작업강도

보통 작업

작업장소

실내

육체활동

손사용, 시각

커리어 전망

가발 산업은 1970년대 효자 수출산업에서 사양산업으로 전환됐으나, 항암환자·탈모 인구를 위한 의료용·맞춤형 원사 영역은 꾸준한 수요를 보인다 .[1] 가발 수출은 50년 전 효자 산업의 그늘에서 의료용 영역으로 재편되며 일정 수준 시장을 유지한다 .[2] 하이모는 2001년 업계 최초 3D 두상 스캐너 독자 개발과 형상기억모발 넥사트모 자체 기술로 사양산업을 프리미엄 맞춤가발 시장으로 재편했다 .[3] 홍인표 회장은 사양산업이던 가발을 R&D 투자와 자체 원사 기술로 성장산업으로 전환한 대표 사례로 평가된다 .[4]

워라밸 & 사회적 평가

워라밸

원사 가공 작업은 실내 좌식 환경에서 표백·염색 약품·열처리 장비·이발기구 등을 다루는 화학·기계 복합 작업으로, 약품 휘발성분과 모발 분진 노출에 유의해야 하며 환기 설비와 보호장비 착용이 필수다 .[5] 1970년대 구로공단의 가발공장은 하루 12시간 교대·기숙사 생활 등 노동강도가 극심했으나 현재는 근로기준법 적용과 작업 환경 개선으로 약품·분진 노출이 크게 감소했다 .[6]

사회적 기여

한국 가발 산업은 1960~70년대 외화 획득의 핵심 효자 산업으로 1970년 전체 수출의 약 10%를 책임지며 국가 산업화에 기여했다 .[7] 현재는 항암 치료로 인한 탈모 환자와 소아 백혈병 환자의 의료용 가발 영역이 사회적 의미를 갖는다 — 국립암센터 암환자의료비지원사업은 소아 백혈병 환자에 연 최대 3,000만 원까지 가발 구입비를 지원한다 .[8] 보건복지부는 성인 의료급여수급권자에 대해 연 최대 300만 원 의료비를 지원하며 가발 구입비도 포함된다 .[9]

여담

  • •

    한국 가발 산업은 1960년대 미국 시장 진출을 시작으로 1970년에는 전체 수출의 약 10%를 차지하는 효자산업으로 성장했다 .[10] 1964년 9월 14일 수출산업공업단지개발조성법 제정으로 출범한 구로수출산업공업단지가 가발·다람쥐 등 노동집약 품목 수출의 중심지였으며, 가발은 한국 첫 100억 달러 수출(1977년) 달성의 주역 중 하나였다 .[11] 당시 구로공단의 가발공장에서는 20대 여공 다수가 하루 12시간 정모·염색·재봉 작업을 수행했으며, 1979년 YH무역 여성노동자 사망 사건이 박정희 정권 종식의 한 계기가 됐다 .[12] 사양길에 접어든 산업을 1987년 설립된 하이모가 맞춤가발·형상기억모발 넥사트모 등 자체 원사 기술로 재편하며 사양산업을 성장산업으로 전환했다 .[13] 한국 정부의 수출주도공업화 정책 하에 가발은 1960~70년대 면직물과 함께 한국 경공업 수출의 한 축을 담당했다 .[14]